*

어느 교육기관장이 구성원들에게 했다는 말입니다.

 

"절차를 분명하게 지키셔야 합니다.

그래야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사람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줄 알면서도 저리 얘기하는 장에게

자기가 투명인간인 걸까 싶었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이야기인 줄 모르기 때문에 가릴 것 없이 얘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

심란한 이야기는 듣는 순간보다 듣고 난 다음에 맴돌기 마련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후 내내 불쑥불쑥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절차는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요.

 

여러 팀이 함께 일할 때 절차는,

소외되는 팀 없이 다양한 의견을 민주적으로 반영하고

목표로 하는 일을 구멍 없이 하기 위해 필요하고.

 

안전을 위해 마련된 절차는,

혹시라도 담당자의 개인차로 인해 소홀해지는 구석이 생겨

다치는 사람이나 손해 보는 재산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고.

 

사고가 났을 때의 절차는,

사고를 잘 수습해서 연루된 사람들에게 일어난 피해를 최소화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절차를 잘 지켜야 '책임을 면할 수 있다'라고 하네요.

누구보다 중요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

한편으로 그 사람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잠시 식었습니다.

객관적인 모드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면, 조금은 냉정해질 수 있어요.

 

본질보다 역할, 의미보다 책임, 목적보다 행정이 커져버리는 현상은

주변에도 얼마든지 많아서요.

 

조직까지 갈 것도 없이,

저는 부모나 부부 노릇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종종 느낍니다.

 

아이를 잘못 키웠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아내로서 직무 유기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해내는 많은 일들.

(화내면서 끼니마다 차려내는 밥상을 보면서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저 밥에는 감정에서 나오는 독이 들지 않았을까...? ^^;;)

 

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지 설명하기보다는

'규칙은 지켜야 한다'며 윽박지르고 강요하는 훈육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없는 속 빈 강정이 되지 않았을까...

 

*

내가 작성하는 서류,

내가 처리하는 비용,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서 있는 이 곳,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에 대한 감각 없이

눈앞에 떨어진 것들을 처리하다 보면,

'책임을 면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그런 껍데기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화를 내지 말고

나부터, 내 주변부터 감각을 깨우기를.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며 좋은 기운을 품기를.

이런 아름다운 결론으로 생각 타래를 마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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